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리 브란트 (문단 편집) === 정계 진출 ===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그는 노르웨이 정부 관계자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왔다. 1948년까지 그는 노르웨이 시민이었다. 1948년 그는 독일 사민당에 정식으로 복당했고, 가명이었던 빌리 브란트를 본명으로 하여 독일 국적을 회복했다. 훗날인 [[2021년]] 그가 1948∼1952년 미국 방첩부대(CIC)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https://m.yna.co.kr/view/AKR20211219058000082?section=international/all|#]] 1949년 서독 총선에서 서베를린의 사민당 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독일 연방의회]]에 진출하며, 정치인으로서 공식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이후 약 10년간 그의 정치 역경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보수 진영을 물론이고, 사민당 조직 내에서도 주도권 경쟁 과정에서 숱한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의 망명 시절과 나치 저항 시절 행적에 대한 의문과 출신에 대한 공격을 당했다. 나치 정권 기간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폐해가 된 고국으로 당장 돌아오지 않고 노르웨이에 있다가 상황이 안정되자 귀국한 그는 국내 독일인들이 보기에는 이방인이었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있었다.[* 이웃 국가들에 비해 징집 기간이 길었던 독일에서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도주하는 경우가 제법 있어서 사회 문제가 되었다. 독일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출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참고로 미국의 45대 대통령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트룸프는 17세때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30대 때 독일에 재정착하기 위해 돌아왔으나 독일 당국으로부터 병역 기피 혐의로 영구 추방당했고 결국 그와 그의 가족들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시선은 사민당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국내에서 활동했던 사민당 주류들이 보기에 브란트는 전쟁기간 동안 해외에 망명해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지냈고, 해외인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노르웨이 노동당 등 해외 고위층과 쉽게 연결되며 상대적으로 빠르고 쉽게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브란트는 사민당 베를린주 의장직, 연방 의장단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하였다. 1957년 [[베를린|서베를린]] 시장이 되었다. 서베를린의 유력 정치인으로서 그는 당시 집권 [[기민련]]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이 강대강 전략을 구사한다고 비난하며 소련 및 동독과의 긴장 완화를 주장했다. 당시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며 그렇게 되면 전쟁이 터질 것이라 주장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먼저 [[서독]]과 [[동독]]의 위치를 동등하게 끌어올린 후 미국-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베를린에서 위기는 심화되었고, 급기야 [[1961년]] 동독과 소련은 불시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며 베를린에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그동안 동독 및 소련과의 관계 완화를 주장해 왔던 그에게는 정치적 위기가 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여 [[미국]]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특히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시기는 하필 서독 총선 직전이었는데, 당시 브란트는 사민당의 대표 겸 총리 후보로 선거에 나선 상황이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직후 언론들은 브란트의 사민당이 참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베를린 위기 상황에서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사태의 중심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으며, 노회하고 인기가 전같지 않았던 아데나워가 이끄는 [[CDU/CSU]]는 관심에서 소외되어 갔다. 게다가 소련과 직접 대화하겠다 주장하면서도 미국에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양다리 전술을 구사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동준서주하는 모습이 연일 언론에 집중 조명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빌리 브란트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몰랐던 서독 국민들도 이때 본격적으로 브란트의 연설을 접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선거 초기 사민당의 총선 패배가 예측되자 온건 [[중도좌파]] 성향 지지자들이 대거 결집하였고 이런 일련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사민당은 오히려 의석을 증가시켰다. 이후 사민당은 [[1962년]] [[12월 19일]]의 [[슈피겔]] 스캔들[* 슈피겔 지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의 군사 작전에 대해 보도하자, 국방부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위시로 한 [[기민련]] 내각이 슈피겔 [[기자]]들과 편집부를 [[반역|반역죄]]로 체포한 사건]을 빌미로 과반에 미달하게 된 [[CDU/CSU]]의 대연정을 거부했고 다시 CDU/CSU-자민 연정이 성립되었다.[* 이 선거에서 정치적 위신이 크게 손상된 아데나워는 결국 [[1963년]] 경제부 장관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한다.] 베를린 위기가 그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라는 초기의 전망과 달리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지지율의 반등을 경험한 브란트는 이후에 베를린 장벽 건설 때문에 동서베를린 간의 통행이 갑자기 전면 중단되면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동안 동독과 협상을 진행했고, 서독 중앙정부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베를린에 와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연설을 하여 베를린 시민을 열광케 했고, 케네디 옆에 서있었던 브란트는 이 연설의 후광 효과를 제대로 입었다.[* 이를 두고 만약 케네디가 [[함부르크]](Hamburg)에서 연설했다면 "나는 햄버거(Hamburger)입니다"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왔다.] 이후 1963년 12월 결국 통행증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브란트의 지지도는 더욱 상승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external/www.rt.com/000_arp2128184.jpg|width=100%]]}}} || 빌리 브란트는 [[1963년]] 에리히 올렌하워의 뒤를 잇는 사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바탕으로 당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며 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65년]] 총선에서도 역시 [[기민련]]/[[기사련]]에 뒤지는 2당이었으나 경제위기, 외교 노선 갈등[* 반(反)앵글로색슨 유럽주의 대 친미 대서양주의] 등으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고, 기민/기사련이 [[자유민주당(독일)|자유민주당]]과도 갈라서면서 결국 [[1966년]] 11월, 제1당 [[기민련]]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재와 제2당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재의 협상에 의해서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성립하였다. 90.1%(447/496석)의 의석이 내각에 참여한 것이다. 당초 브란트는 자민당과의 소연정을 고려하고 있었다. CDU/CSU와는 동방정책 공약을 두고 전격적으로 충돌한 전력이 있었고 또 선거 과정에서 브란트의 과거사를 공격한 구원이 있었고, 사민당과 자민당의 [[독일 연방의회|하원]] 의석만으로도 하원의 과반을 넘길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 그러나 사민당 원내대표 헤르베르트 베너의 강력한 설득과 함께 자민당 [[에리히 멘데]] 대표 역시 사민당과의 연정에 미온적 태도로 나오면서 결국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꿔 대연정을 수락했다. 제1당 기민련의 키징어 총재가 총리를 맡고, 제2당 사민당에서는 빌리 브란트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포함해서 총 9명의 장관이 내각에 참여하였다.[* 독일에서는 연립정부의 2당 대표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는 것이 관례다. 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닌데, [[2017년]] [[제19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로 출범한 [[앙겔라 메르켈]] 4차 내각에서 당시 사민당의 수장 [[마르틴 슐츠]]는 입각하지 않았으며, 사민당 몫 부총리직은 [[올라프 숄츠]] 당시 [[함부르크]] 시장이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가져갔다.] 사민당 역시 연정 참여로 수권정당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쌓게 되었다. 외무장관으로서 브란트는 자신의 안보 참모인 에곤 바를 정책기획국장에 임명하는 등 동방정책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하려 했다. 동방정책 추진은 대연정 당시 브란트가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브란트는 구체적으로 [[소련]]과의 상호 무력 사용 포기 협정,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 조정 협정을 추진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교가 단절됐던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도 정상화하였다. 키징어 역시 처음에는 동서독 화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근본적으로 기존의 공산권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기민련과 공산권과의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동방정책]]을 내건 사민당의 충돌로 대연정은 무너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